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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순두부

임소금_EUN graphy 2024. 2. 5. 13:54

 

 

모든 관계는 노력하지 않으면 상대방과 나 사이의 텐션은 늘어지고 만다.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도, 상대방의 노력만으로도 유지되기 힘든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힘이라고 절실히 느끼는 요즘이다. 서로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이 간절히 사랑했던 연인도, 하루에 2시간씩 통화하고 만나면 또 할 말이 많았던 어떤 시절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도, 결국 시간 앞에서는 그 단단했던 유대감이 흐물흐물한 순두부처럼 부서지고 마는 것이다.

부서진 순두부 같은 유대감은 연인, 친구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사이에서도 피할 수 없다. 형제들은 각자의 가정을 갖게 되고, 살아가는 서로의 시간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다 보면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는 게 가족일지도 모른다.

 

그 관계들 안에서 누군가는 늘어지는 관계에 쿨하게 떠나기도 하고, 또다른 누군가는 미련을 갖고 늘어지게 마련인데, 나는 늘 후자였다. 누군가와의 관계 안에서 나는 늘 약자였고, 관계에 목말라 매달리는 역할이었다.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사이에서 혹시 그 멀어지는 이유는 내 탓이 아닐까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역할은 모두 내 담당이었다.

어떻게 모든 관계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작될 때처럼 에너지가 넘치고, 끈적끈적할 수 있을까. 단단히 얽히며 서로를 알아가던 시간이 지나면, 그 얽혔던 관계가 슬그머니 풀어지며 느슨한 연대로 변화해 가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나는 끊임없이 단단하게 얽혀있기를 바랐다. 영원이라는 단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나의 상대방에게는 그 영원이라는 단어를 올가미처럼 던지고는 했다. 하지만 인심 좋게 그 올가미에 걸려 나의 무식한 집착에 답을 해줄 사람은 애초에 없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 상황이 요즘의 나를 나락으로 밀어 추락시킨다.

 

사실 이 관계의 변화를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뿐일지도 모른다. 상대방은 여전히 나와의 유대감에 만족하고, 여전히 그와 나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단단한 관계라고 정의하고 있을 텐데 사사로운 에피소드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는 망상증 환자인 나는 혼자 상처받고 혼자 괴로워하는 것이다. 사소한 말투, 답이 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나에게 마음을 전달하는 문장의 길이, 단어와 단어 사이의 공백까지 나를 망상 지옥으로 밀어 넣는 것들은 수도 없이 많다.

특히 그 망상들은 잠 못 드는 깊은 밤 컴컴한 천장을 올려보는 시간에 나를 더 어둡고 깊은 모서리로 밀어 넣고 자책하고 자해하게 만든다.

자주 연락을 주고받던 오랜 친구와 소식을 전하는 시간의 틈이 벌어졌다고 느끼면 혹시 내가 친구에게 전했던 말속에 나도 모르는 어떤 날카로운 조각을 넣어 전했던 것은 아닐까, 혹시 친구가 내게 전했던 말 속에 내가 알아채주길 바랐던 어떤 비밀 쪽지를 넣어 보냈는데 내가 알아채지 못해 친구의 마음이 닫혀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등의 끊임없는 망상을 마치 끝나지 않는 끝말잇기처럼 밤이 새도록 해나가는 것이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있어도 마치 8K 고화질 영상처럼 눈꺼풀 안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망상 필름은 불면의 좋은 재료가 된다. 하지만 그 망상 필름도 새벽이 오면 상영이 끝나고 나를 선잠으로 보내주기 마련이고, 내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의 서사는 나 혼자 써 내려간 것일 뿐이다.

 

이른 새벽 선잠에 빠져들며 바라는 것은 당신과 나의 관계가 얼렸다 녹여내어 단단하고 쫀쫀한 조직감을 갖게 된 모두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뚝배기 속 숟가락 공격을 받아 맥없이 부서지는 순두부 같은 관계라 해도 괜찮다. 부서질 순두부라고 해도 우리의 어떤 시절은 뽀얗고 탱탱한 순간을 지나왔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