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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방집 막내손녀

by 임소금_EUN graphy 2023. 7. 12.

 

오늘 밤 꿈엔 우리화방에가서 엄마랑 같이 캔버스를 짜고싶네요.
아직 성업중이거든요.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 무렵, 동네 어른들은 할아버지가 나를 안고 길을 걸어가면

"아유, 화방집 막내손녀 어디가니?"

하며 한 번씩은 볼을 쓰다듬어주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세상 가장 귀한 보물을 보여주듯이 작은 나를 품에 꼭 안고서 빼꼼히 사람들에게 자랑하시며 '우리 소금이는 나한테 온 마지막 보물이야.'라고 말씀하셨다고 들었다.

우리 집은 광주에서 꽤 오랫동안 화방을 했었는데, (현재도 동명의 화방이 운영 중이라 상호명은 쓰지 않겠다) 지역 사립대 미술교수시자, 현대미술 화가셨던 작은할아버지를 위해 작은할아버지의 바로 위형인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광주까지 내려와 시작하신 사업이었다. 화방을 개업하실 때는 엄마와 아빠가 만나기도 전이었고, 아빠가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로 온 가족이 내려와 대학교 진학을 하면서부터였다고 들었다. 사립대 미대 교수셨던 작은할아버지 덕분에 광주에서 꽤 유명한 화방이 되었고, 화방은 늘 미대 교수님들과 미대학생들, 미술학도들로 북적거렸었다고 했다.

우리화방은 아빠가 대학에서 엄마를 만나 결혼하신 후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셨던 엄마가 학교를 그만두시고 할아버지를 도와 화방운영을 맡게 되면서 최전성기를 누렸는데, 그때는 화방에 일하는 삼촌들만 3-4명, 집안일을 봐주는 이모가 1명이나 있을 정도로 유복했다고 나는 듣기만 했다. (너무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없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와 오빠도 그저 어렴풋이 기억난다고 할 정도니까)

신학기 시즌이 시작되고 한참 바쁠 때면 집에서 나를 봐주시던 할머니도 화방에 나가서 손을 보태야 하셔서 나는 가게 한켠에 할아버지가 앉아계시던 일명 사장님 의자에 보관되곤 했는데, 6-7살 무렵의 기억으로 캔버스를 짜는 엄마와 야간수업을 마치고 퇴근하신 아빠가 미술용품을 챙겨 납품하시던 모습들이 꿈처럼 어렴풋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에는 캔버스를 짜는 엄마를 도와 못질을 할 때도 있었고(늘 삐뚤게 박아서 결국 엄마가 다시 해야 했지만), 액자 표구를 준비하시는 엄마를 도와 물 붓질도 열심히 했었더랬다. 중학교 때는 학교를 마치면 곧장 화방으로 가서 할아버지 의자에 앉아 숙제하다가 저녁밥 시간이 되면 할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퇴근하곤 했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야자가 생겨서 화방에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만화부 전시회를 할 때는 우리화방에서 이젤도 단체구매하고, 부원들 작품을 판넬로 만들기도 했었다.

그렇게 내가 기억도 없는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나에게 우리화방이란 아주 당연한 공간이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을 넘어갈 무렵, 할아버지가 크게 보증사기를 당하시면서 우리 가족에겐 화방은 우울하고, 한없이 침몰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 일을 계기로 할아버지는 지병이 악화되셔서 한 번 더 나를 동네 사람들에게 '내 인생 최고의 보물'이라고 자랑하시지도 못하고 한동안 자리에 누워계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의 빚을 아빠와 엄마가 책임져야 하는 시간이 오자, 우리 집은 더 이상 슬픔이 버티고 있을 틈이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변화가 화방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내 유년 시절의 모든 기억과 우리 가족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광주 시내 한가운데, 미술하는 사람들은 이름만 대면 알던 우리화방은 폐업의 수순을 밟았다. 이십여 년을 넘게 운영했던 화방을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위탁판매 하던 물건들을 돌려보내야 했고, 외상으로 구매하던 단골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사정 설명을 하고 금액정리를 부탁해야 했고, 언제 누가 맡겼는지도 모르는 그림들을 버려야 할지 인근 다른 화방에 맡겨야 할지를 엄마는 매일매일 고민하고, 처리해 나가야 했으니까.

엄마의 꿈이었던 국어 선생님을 그만두고 화방에서 작은 사장님으로 이십여 년의 시간을 보낸 엄마는 엄마의 하루를 온전히 보내던 그 공간을 정리하면서 몸이 아프기 시작하셨고, 몸이 아프시니 마음마저 병을 얻게 되셨다. 엄마는 매일 눈물을 흘리셨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허망하다고 하셨다가, 할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럽다고 하셨다가, 화방에서 즐거웠던 일을 떠올리며 웃음을 짓기도 하셨다. 어렸던 우리 삼남매는 그런 엄마의 시간을 그저 지켜볼 방법밖에 없었다. 이십여 년 단골들은 우리의 사정을 안타까워했지만, 해결해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광주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했던 우리화방은 문을 닫았다.

폐업을 한다고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었다. 그 후로 엄마는 외상값을 갚지 않는 단골들에게 몇 년 동안 독촉 전화를 해야 했고, 아빠는 가게를 정리하면서도 부족했던 할아버지의 보증사기 빚을 갚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밤중에 귀가하셔야 했다.

그렇게 우리화방은 우리 가족에게서 떠나갔다. 슬프고 아픈 상처만을 남기고.

화방을 정리하고서 우리 가족은 일부러 그 동네로는 다니지 않았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화방을 그만두시고 늘 쾌활하던 엄마가 우울해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아빠의 얼굴이 피곤으로 그늘지는 모습을 집에서 계속 마주쳐야 했으니까.

꽤 시간이 지난 후 친구들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화방이었던 그 상호를 다른 사람의 영업장 상호로 길거리에서 마주쳤던 그날, 친구들과 헤어지고 지나쳤던 그 길을 다시 돌아가 우리화방 이름이었던 그 간판을 우두커니 서서 쳐다보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졌던 날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뭐가 그리 서러워서 꺽꺽 소리를 내며 울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화방은 원래 우리집이었다. 우리집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는 모습이 너무 낯설고 무서워 버스 안에서 많이도 울다가 가까스로 추스르고 집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엄마, 우리화방 아직 예술의 거리에 있던데?"

"어, 그거 OO삼촌이 하는 거야"

우리화방 이름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서 친분이 있던 분이 엄마, 아빠에게 말씀하시고 상호를 이어가시고 있다며, 그러나 엄마는 아직 '그' 화방엔 안 가봤다며 서둘러 말씀을 정리하시고 부엌으로 들어가시는 엄마의 뒷모습에 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꿀꺽 삼켰다.

우리화방이 우리가족의 공간으로 마무리되었으면 좋았을까? 아니면 우리가족이 아닌 다른가족의 공간이 된 모습을 영원히 모르고 살았으면 더 좋았을까?

나는 아직도 우리화방을 생각하면 눈물이 고인다. 우리화방엔 할아버지도 계셨고, 할머니도 계셨고, 지금의 나보다 젊었던 엄마와 아빠가 계셨다. 나를 귀여워해 주던 직원 언니들과 삼촌들은 이제 어디선가 엄마아빠가 되어 잘살고 있겠지.

'그'화방은 아직 영업을 하고 있지만, 우리화방은 그 시절 폐업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에선 영업 중이다.

그리고 난 여전히 화방집 막내손녀로 살아가고 있다. 재벌집 막내아들 부럽지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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