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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글8

그날은 눈이 내렸어. 안녕, 이제야 너에게 받은 상처가 메꿔진 건지, 조금은 담담한 마음으로 그날의 내 이야기를 전해. 혹시 기억이 날까, 그날은 눈이 내렸어. 늦은 퇴근을 하던 날이었는데, 아마 내가 처음 맡았던 프로젝트의 미팅이 있던 날이었을 거야. 난 아직 어렸었고, 처음 맡은 미팅에 긴장을 해서 그해 겨울 손꼽히게 추웠던 날이었는데도, 짧은 정장 치마에,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던 검정 코트, 출근 기념으로 선물 받았던 골드 뱀피 스틸레토힐을 신었던 거로 기억해. 정성스레 꾸몄던 날이어서 출근하던 길에도, 긴장되던 미팅 시간에도, 온통 네 생각뿐이었어. '퇴근하고 너를 만나야지.' 하고 말이야. 이 마음을 빨리 전하고싶어서 걸었던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너의 기침 소리가 걱정이 돼서 약국에서 잘 듣는다는 감.. 2024. 2. 14.
너무나 눈부신 그날은 어떤 날이었을까요. 눈도 뜨지 못하게 햇살이 눈 부셨던 날이었었는지, 아니면 앞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안개로 가득 찬 날이었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 음악의 박자에 맞춰 신나게 걸음을 옮겼던 날이었던 것만큼은 오늘 걸었던 발걸음처럼 선명히 기억납니다. 이 음악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어떻게 저의 플레이리스트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곡 상위권으로 올라와 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여러 번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셀 수 없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곡이란 건 확실합니다. 음악이란 게 참 신기한 힘이 있어서 플레이되는 순간 저를 어떤 시간, 어떤 장소로 데려다주곤 하는데요, 이 음악엔 저의 많은 시간과 순간들이 함께합니다. 싱그러운 초여름 저녁 시간 남자친구와 함께 퇴근.. 2024. 2. 13.
아빠의 그라인더 평소의 주말 아침이었다면 늘어지게 자고 있었을 오전 10시 반이지만, 오늘은 11시에 출발하는 광주행 SRT를 놓칠까 정신줄을 부여잡고 호다닥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연신 핸드폰 화면의 티켓 좌석번호를 확인해 본다. 어정쩡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역무원을 지나쳐 두리번거리며 좌석을 찾아 앉은 뒤에야 늦을까 긴장했던 마음이 탁 소리를 내며 풀어진다. 오랜만에 꺼내입은 화려한 플라워패턴의 롱원피스와 찰캉찰캉 소리를 내는 체인핸드백이 어색해서인지 자리에 앉아서도 옷매무새를 이리저리 정리해 보지만, 아침 일찍 서둘렀던 마음처럼 원피스 끝자락도 내 맘처럼 정리가 되지 않는다. 아침부터 서두르는 와중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 나니 곧 열차가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고, 의자.. 2024. 2. 5.
부서진 순두부 모든 관계는 노력하지 않으면 상대방과 나 사이의 텐션은 늘어지고 만다.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도, 상대방의 노력만으로도 유지되기 힘든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힘이라고 절실히 느끼는 요즘이다. 서로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이 간절히 사랑했던 연인도, 하루에 2시간씩 통화하고 만나면 또 할 말이 많았던 어떤 시절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도, 결국 시간 앞에서는 그 단단했던 유대감이 흐물흐물한 순두부처럼 부서지고 마는 것이다. 부서진 순두부 같은 유대감은 연인, 친구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사이에서도 피할 수 없다. 형제들은 각자의 가정을 갖게 되고, 살아가는 서로의 시간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다 보면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는 게 가족일지도 모른다. 그 관계들 안에서 누군가는 늘어지는 관계에 쿨하게 떠나기도 하고.. 2024. 2. 5.
마흔이 되었습니다. 내 이름은 임소금. 아직은 만 39세 그리고 5개월. 서른 자락의 끝에서 발버둥 치는 마흔 초년생. 30대 마지막 추석이 지났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나는 이제 만 나이로도 마흔이 되었다. ​ 까짓것 마흔, 그래 와라. ​ ​ [프롤로그] ​ 까짓것, 마흔 쿵짝쿵짝 시끄러운 음악이 가득 찬 어지러운 공간,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와 레이저빔처럼 꽂힌다. 왜 나는 마지막 순서에 자리를 잡고 앉았던 걸까. 아니다 이건 내가 정한 순서가 아니다. 난 그냥 앉았고 잔인한 운명이 나를 모두에게 주목받게 만들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나에게 이동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서울의 젊은이들이 꾸역꾸역 모여든다는 강남 한복판의 힙한감각으로 잘 꾸며진 공간에서 .. 2023. 9. 17.
근손실은 무서워요. 함께 글질(쇠질)을 하실래요? 삼대 몇 쓰시나요? “여러분, 글근육을 키우시는 겁니다.” 낯선 사람들과 낯선 공간에 모여 낯선 안내자에게 앞으로의 낯선 시간에 대한 안내를 듣습니다. 낯선 안내자에게 ‘글근육’이라는 낯선 단어를 듣고 고개를 갸웃해 봅니다. 도대체 글을 쓰는 근육이 뭘까요? 어린 시절부터 곧잘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요,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또래 친구들 안에서는 좋아하던 아이돌을 소재로 한 팬픽을 써서 유통하는 팬픽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국어 교사셨기 때문에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저는 책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엄마는 어린 저에게도 꽤 엄하게 맞춤법이나 글쓰기에 대해서 가르쳐주시곤 했어.. 2023. 7. 21.